학교 입학 등록이 금요일에 있었다.
하지만 난 그곳에서 다시 입학등록을 위한 새로운 약속날짜가 잡혔다. 원인은 내 서류들이 프랑스 공식 번역가가 한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대사관에서 공증만 받은것이기 때문이란다. 이 몇몇 서류들은 한국 번역업체에서 담당한것, 내가 프랑스친구한테 도움받은 것들이 섞여 있었고, 그 모든 절차가 끝난 후엔 파리에 있는 주불대한민국대사관에서 공증을 받은 나름 합법적인 서류임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왜? 왜 굳이 프랑스에서 지정한 번역가들에 의해서 서류가 처리되어야하는건지 나는 이해가 할 수가 없었다.
입학등록의 부푼 마음을 안고 금요일 아침 버스를 탔는데, 결국엔 복잡한 서류절차에 휘말리고 말았다.
이날 정오엔, 은행계좌가 Tours에서 내가 살고 있는 도시인 Grenoble의 은행으로 잘 옮겨졌는지 확인을 위한 은행약속이 잡혀있어서 학교엘 갔다가 아직 시간이 남아 근처 맥도날드에 맥플러리를 시켜 Déjeunette Finlandaise라는 (일명 핀란드식 점심) 맛난 빵(그때는 맛있지도 않았다)과 같이 점심을 대체하면서 프랑스 지정 공식 번역가들의 목록을 찾아봤다.
"여기를 클릭"
찾기가 여간 쉽지가 않다. 나는 그르노블에 살고 있으니 파리까지는 너무나 멀어(비록 우편으로 처리하긴 하지만) 가까운 리옹에 살고 있는 최지안 번역가님에게 컨택을 시도해본다.
여러 전화번호가 있었지만 결국엔 핸드폰번호로 성공. 휴. 근데 서류 한 통당 30유로라니. 비싸도 너무 비싸다. 하지만 어쩌랴. 이렇게 하지 않으면 모든것이 물거품이 되는데.
이사한지 이제 겨우 2주가 넘어가는 시점에서 나는 프린터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번역가님에게 보낼 몇몇 디플롬 인쇄를 해야할 일이 있어서 오늘 이 기회를 삼아 하나 장만해야지 하고 전자상가들이 밀집해 있는 곳으로 버스를 타고 갔다. 그런데 거의 다다른 찰나, 학교안에 있는 복사실에서 인쇄했으면 금방 우편 부칠 수 있었을텐데 라는 생각이 들더라. 나 왜 그렇게 미련했을까.
그냥 이렇게 온거 프린터기 가격비교에 들어간다. 우선 Conforma, Fnac, Darty, Carrefour 이렇게 쭉 돌아봤지만 마음이 너무나 급해서 뭐가뭔지 머리에 들어올리가. 결국엔 집으로 가서 근처에 복사하는 곳이 있나 구글맵으로 찾아보았다. 버스를 또 타야했지만 근처 고등학교 안에 복사창구가 있는걸 확인하고는 다시 밖으로 나가 버스를 탔다. 고등학교를 지나 버스정류장이 있어서 다행이었지. 프랑스고등학교는 외부인들이 출입금지라는걸 내가 또 깜박하고 있었다. 그걸 내리기전에 재빠르게 인지하고는 그냥 그 버스를 타고 끝까지 다시 학교로 갔다. (다행히 학교 방향 버스였다)
복사카드를 구입하여 인쇄를 하고, 그 옆에 있는 우체국에 가서 드디어 서류를 부쳤다. 오늘이 금요일이라 약간 마음이 안정됨을 느낀다. 다시 집으로 돌아오면서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일이란 아주 희귀한 어떤 가치가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더라.
아까 저녁에 잘 알고 있는 우리나라 삼성 리움 미술관을 건축한 Jean Nouvel과의 인터뷰를 담은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그 또한 건축분야의 전문가 중에 전문가. 그가 말하는 방식과, 말하는 내용과, 말하는 눈빛. 무언가가 남달랐다. 지금 다시 인터뷰하고 있는 그의 얼굴을 떠올려보니 그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그가 말 할때는 항상 얼굴에 생기가 돌며 자신의 신념을 아주 자연스럽게 얘기하는데 있었다. 그것은 바로 열정이었다. 그 열정에서 전문가가 탄생하는것이리라. 얼마전에 파리에서 길을 걸어가는 중에 우연히 그가 건축한 l'institut du Monde d'Arabe을 직접 눈으로 보게 되었을때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그 감탄이란. 실로 너무나 감동적이어서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두 번째로 나는 무용가 Anne Teresa de Keersmeaker를 보고는 한마디로 반해버렸다. 그녀는 자신의 갸날픈 몸으로 자신만이 표현 할 수 있는 언어로 몸짓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작품(클릭)"
그녀의 나이 이제 쉰을 넘었다. 춤을 추기 시작한지 40년이 넘은 지금 또한 그녀는 끊임없이 춤을 추고 또 인재들을 양성하고 있다. 자신의 열정을 쉼없이 분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작품들을 하나하나 보고 있자니 나는 언제 저런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든다. 춤 40년. 정말 존경스럽다.
전문가들은 항상 어디에서나 빛이 난다. 비록 얼굴이 못생기거나 옷을 잘 세련되게 입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남다른 포스는 어느 누구도 흉내낼 수가 없다. 나도 그런 전문가가 되고싶다는 열망이 생겨버렸다. 솔직히 얼마전까진 단순한 연구원이 되는것이 나의 목표라면 목표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엔 무언가 확고한 나의 신념이 생긴 순간이었다. 가슴이 쉴 새 없이 뛰고 무언가 할 일들이 많아지는 기분에 마음이 급해졌다.
9월 중순부터 시작될 나의 (아직은 평범한) 석사시작은 이러한 목표를 향한 시발점이 될 것이다. 나의 철없던 그 수많은 방황 끝에 나는 바로 프랑스에서 노인학을 선택했다. 여기까지 오기까지도 힘들었지만 앞으로는 훨씬 많이 힘들거라는 거 잘 알고 있다. 지금도 이런 서류 행정 일들로 스트레스가 여간 생겨나는게 아닌데 본격적으로 들어가면 얼마나 그것들이 내 머리 사방을 쑤시고 다닐지 가히 상상도 되지않는다.
어쨌든 이제 그 초석을 갈고 닦을 차례가 되었다.
Festina lente (급할수록 돌아가라)
하지만 난 그곳에서 다시 입학등록을 위한 새로운 약속날짜가 잡혔다. 원인은 내 서류들이 프랑스 공식 번역가가 한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대사관에서 공증만 받은것이기 때문이란다. 이 몇몇 서류들은 한국 번역업체에서 담당한것, 내가 프랑스친구한테 도움받은 것들이 섞여 있었고, 그 모든 절차가 끝난 후엔 파리에 있는 주불대한민국대사관에서 공증을 받은 나름 합법적인 서류임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왜? 왜 굳이 프랑스에서 지정한 번역가들에 의해서 서류가 처리되어야하는건지 나는 이해가 할 수가 없었다.
입학등록의 부푼 마음을 안고 금요일 아침 버스를 탔는데, 결국엔 복잡한 서류절차에 휘말리고 말았다.
이날 정오엔, 은행계좌가 Tours에서 내가 살고 있는 도시인 Grenoble의 은행으로 잘 옮겨졌는지 확인을 위한 은행약속이 잡혀있어서 학교엘 갔다가 아직 시간이 남아 근처 맥도날드에 맥플러리를 시켜 Déjeunette Finlandaise라는 (일명 핀란드식 점심) 맛난 빵(그때는 맛있지도 않았다)과 같이 점심을 대체하면서 프랑스 지정 공식 번역가들의 목록을 찾아봤다.
"여기를 클릭"
찾기가 여간 쉽지가 않다. 나는 그르노블에 살고 있으니 파리까지는 너무나 멀어(비록 우편으로 처리하긴 하지만) 가까운 리옹에 살고 있는 최지안 번역가님에게 컨택을 시도해본다.
여러 전화번호가 있었지만 결국엔 핸드폰번호로 성공. 휴. 근데 서류 한 통당 30유로라니. 비싸도 너무 비싸다. 하지만 어쩌랴. 이렇게 하지 않으면 모든것이 물거품이 되는데.
이사한지 이제 겨우 2주가 넘어가는 시점에서 나는 프린터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번역가님에게 보낼 몇몇 디플롬 인쇄를 해야할 일이 있어서 오늘 이 기회를 삼아 하나 장만해야지 하고 전자상가들이 밀집해 있는 곳으로 버스를 타고 갔다. 그런데 거의 다다른 찰나, 학교안에 있는 복사실에서 인쇄했으면 금방 우편 부칠 수 있었을텐데 라는 생각이 들더라. 나 왜 그렇게 미련했을까.
그냥 이렇게 온거 프린터기 가격비교에 들어간다. 우선 Conforma, Fnac, Darty, Carrefour 이렇게 쭉 돌아봤지만 마음이 너무나 급해서 뭐가뭔지 머리에 들어올리가. 결국엔 집으로 가서 근처에 복사하는 곳이 있나 구글맵으로 찾아보았다. 버스를 또 타야했지만 근처 고등학교 안에 복사창구가 있는걸 확인하고는 다시 밖으로 나가 버스를 탔다. 고등학교를 지나 버스정류장이 있어서 다행이었지. 프랑스고등학교는 외부인들이 출입금지라는걸 내가 또 깜박하고 있었다. 그걸 내리기전에 재빠르게 인지하고는 그냥 그 버스를 타고 끝까지 다시 학교로 갔다. (다행히 학교 방향 버스였다)
복사카드를 구입하여 인쇄를 하고, 그 옆에 있는 우체국에 가서 드디어 서류를 부쳤다. 오늘이 금요일이라 약간 마음이 안정됨을 느낀다. 다시 집으로 돌아오면서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일이란 아주 희귀한 어떤 가치가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더라.
아까 저녁에 잘 알고 있는 우리나라 삼성 리움 미술관을 건축한 Jean Nouvel과의 인터뷰를 담은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그 또한 건축분야의 전문가 중에 전문가. 그가 말하는 방식과, 말하는 내용과, 말하는 눈빛. 무언가가 남달랐다. 지금 다시 인터뷰하고 있는 그의 얼굴을 떠올려보니 그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그가 말 할때는 항상 얼굴에 생기가 돌며 자신의 신념을 아주 자연스럽게 얘기하는데 있었다. 그것은 바로 열정이었다. 그 열정에서 전문가가 탄생하는것이리라. 얼마전에 파리에서 길을 걸어가는 중에 우연히 그가 건축한 l'institut du Monde d'Arabe을 직접 눈으로 보게 되었을때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그 감탄이란. 실로 너무나 감동적이어서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두 번째로 나는 무용가 Anne Teresa de Keersmeaker를 보고는 한마디로 반해버렸다. 그녀는 자신의 갸날픈 몸으로 자신만이 표현 할 수 있는 언어로 몸짓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작품(클릭)"
그녀의 나이 이제 쉰을 넘었다. 춤을 추기 시작한지 40년이 넘은 지금 또한 그녀는 끊임없이 춤을 추고 또 인재들을 양성하고 있다. 자신의 열정을 쉼없이 분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작품들을 하나하나 보고 있자니 나는 언제 저런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든다. 춤 40년. 정말 존경스럽다.
전문가들은 항상 어디에서나 빛이 난다. 비록 얼굴이 못생기거나 옷을 잘 세련되게 입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남다른 포스는 어느 누구도 흉내낼 수가 없다. 나도 그런 전문가가 되고싶다는 열망이 생겨버렸다. 솔직히 얼마전까진 단순한 연구원이 되는것이 나의 목표라면 목표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엔 무언가 확고한 나의 신념이 생긴 순간이었다. 가슴이 쉴 새 없이 뛰고 무언가 할 일들이 많아지는 기분에 마음이 급해졌다.
9월 중순부터 시작될 나의 (아직은 평범한) 석사시작은 이러한 목표를 향한 시발점이 될 것이다. 나의 철없던 그 수많은 방황 끝에 나는 바로 프랑스에서 노인학을 선택했다. 여기까지 오기까지도 힘들었지만 앞으로는 훨씬 많이 힘들거라는 거 잘 알고 있다. 지금도 이런 서류 행정 일들로 스트레스가 여간 생겨나는게 아닌데 본격적으로 들어가면 얼마나 그것들이 내 머리 사방을 쑤시고 다닐지 가히 상상도 되지않는다.
어쨌든 이제 그 초석을 갈고 닦을 차례가 되었다.
Festina lente (급할수록 돌아가라)